양산시 독립기념관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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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진 사진 일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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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일제강점기
크기 : 20×30(cm) 외


근대 학문을 배우다
우산(右山) 윤현진은 1892년 9월 16일 양산 상북면에서 태어났다. 양산에서 구명학교(현 구포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배재학당에 진학하여 영어와 근대학문을 배웠다. 이후 일본 메이지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학문을 이어갔다. 일본에서 그는 신익희, 안재홍 등 유학생들과 함께 ‘조선유학생학우회’를 결성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16년 대학을 졸업한 윤현진은 국내에 머물며 양산, 부산, 구포 일대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하다가, 1919년 3월 20일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차장 윤현진
윤현진은 상하이에 도착한 즉시 독립임시사무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내무부위원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성정부, 대한국민의회와 통합하면서 정부 조직을 개편하였는데, 이때 윤현진은 임시정부의 살림살이를 담당하는 중책인 재무부 차장에 선임되었다. 윤현진은 국내에서 활동하던 형 윤현태의 도움으로 상하이 임시정부에 자금을 조달하였으며, 애국공채를 발행해 독립운동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도 했다.

상하이에 잠들다
상하이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윤현진은 1921년 9월 누적된 과로와 장티푸스로 인해 프랑스 조계의 천주교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를 아끼던 상하이의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쾌유를 빌었다. 특히 도산 안창호는 직접 간호를 하고, 소지품을 팔아 병원비를 내주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윤현진은 투병 끝에 만 29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독립하지 못하면 나의 뼈를 고향에 묻지 말며, 내 자녀를 혼인시키지 말라”
-윤현진의 유언

윤현진의 장례는 9월 19일 임시정부 요인들을 포함한 추도객 16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다. 그의 유해는 상하이 정안사공묘에 안장되었으며, 묘소에는 형 윤현태에 의해 ‘윤현진묻음’이라고 적힌 묘비석이 세워졌다.
광복 후에도 윤현진의 유해는 상하이에서 돌아오지 못하다가, 광복 50주년을 맞이한 1995년에 이르러서야 조국으로 봉환되어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