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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 편지
시대 : 현대(1951, 1952)
크기 : 19×26.5(cm) 외
신익희(1894~1956)는 일본유학시절 우산 윤현진과 함께 조선유학생학우회의 핵심적 인물로 활동하며, 『학지광(學之光)』의 발간을 주도하였다. 당시 유학생학우회 제5기(1915~1916.2) 회장이 신익희였고, 총무가 윤현진이었다. 신익희는 윤현진보다 2살 어렸지만 친구이자 동료로써 상해 망명 이후에도 관계를 지속하였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보직을 나누어 맡았으며(내무차장 신익희, 재무차장 윤현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활동도 함께 하였다.
윤현진 선생이 돌아가신 후, 제2대 국회의원 시절 양산을 찾은 신익희 선생은 박순천 여사와 함께 2번이나 윤현진의 집(현 중부동 256)을 직접 찾아가, 윤현진의 아들 윤동건에게 “내가 죽고 아버지가 살았어야 했는데, 아버지가 죽고 내가 살았다.”라며 안타까워한 일화가 유명하다. 또한 직접 아들 윤동건을 데리고 양산 남부시장 등 선거 유세장을 돌며, “윤현진 선생의 항일독립 정신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고 연설하기도 하였다. 윤현진과의 특별했던 인연이 그의 아들에게까지 이어진 것이다. 1959년 춘추공원에 건립된 기념비도 윤현진에 대한 신익희 선생의 애정을 잘 반영한다.
크기 : 19×26.5(cm) 외
신익희(1894~1956)는 일본유학시절 우산 윤현진과 함께 조선유학생학우회의 핵심적 인물로 활동하며, 『학지광(學之光)』의 발간을 주도하였다. 당시 유학생학우회 제5기(1915~1916.2) 회장이 신익희였고, 총무가 윤현진이었다. 신익희는 윤현진보다 2살 어렸지만 친구이자 동료로써 상해 망명 이후에도 관계를 지속하였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보직을 나누어 맡았으며(내무차장 신익희, 재무차장 윤현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활동도 함께 하였다.
윤현진 선생이 돌아가신 후, 제2대 국회의원 시절 양산을 찾은 신익희 선생은 박순천 여사와 함께 2번이나 윤현진의 집(현 중부동 256)을 직접 찾아가, 윤현진의 아들 윤동건에게 “내가 죽고 아버지가 살았어야 했는데, 아버지가 죽고 내가 살았다.”라며 안타까워한 일화가 유명하다. 또한 직접 아들 윤동건을 데리고 양산 남부시장 등 선거 유세장을 돌며, “윤현진 선생의 항일독립 정신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고 연설하기도 하였다. 윤현진과의 특별했던 인연이 그의 아들에게까지 이어진 것이다. 1959년 춘추공원에 건립된 기념비도 윤현진에 대한 신익희 선생의 애정을 잘 반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