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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희 훈장 및 훈장증
시대 : 1990
크기 : 41×30.2(cm)(훈장증)
서병희(徐炳熙, 1867~1909)는 양산군 중북면 좌삼리(현 양산시 상북면 좌삼리 97번지)에서 태어났다. 좌삼리는 달성 서씨 집성촌이다. 대한제국 말기, 을사늑약으로 국운이 쇠하자 이를 한탄하여 1907년 2월 서울로 상경하여 고종의 강제 퇴위가 발표되고, 군대해산이 이루어진 다음인 1907년 11월에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허위(許蔿)의 휘하에 들어갔다. 그 뒤 허위로부터 영남으로 내려가 거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1907년 말 해산군인 51명을 거느리고 영남으로 내려와 의병항전을 벌이게 되었다.
1908년 5월 양산 일대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면서 양산군 하서면·하북면 등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을 벌여 피해를 입혔다. 1909년 2월부터 의병장이 되어 경상남도 전역을 전전하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09년 10월 11일 창원군 내서면 여율리에서 밀고를 받고 출동한 마산주재소 일본 경찰 2명에게 붙잡혀 순국하였다. 취조 과정에서도 끝까지 부하들의 이름과 잠복지 등을 밝히지 않고, 향년 43세로 순국했다.
국권 상실을 끝까지 막기 위해 의병활동을 했던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양산시 상북면 수서로 159(좌삼리 97번지)에 그의 생가가 있었으나 현재는 멸실되고 생가터와 기념비가 남아 있다.
서병희 부대와 같은 후기 항일 의병은 일제의 주권 강탈을 늦췄으며, 향후 전개될 국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평가된다.
크기 : 41×30.2(cm)(훈장증)
서병희(徐炳熙, 1867~1909)는 양산군 중북면 좌삼리(현 양산시 상북면 좌삼리 97번지)에서 태어났다. 좌삼리는 달성 서씨 집성촌이다. 대한제국 말기, 을사늑약으로 국운이 쇠하자 이를 한탄하여 1907년 2월 서울로 상경하여 고종의 강제 퇴위가 발표되고, 군대해산이 이루어진 다음인 1907년 11월에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허위(許蔿)의 휘하에 들어갔다. 그 뒤 허위로부터 영남으로 내려가 거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1907년 말 해산군인 51명을 거느리고 영남으로 내려와 의병항전을 벌이게 되었다.
1908년 5월 양산 일대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면서 양산군 하서면·하북면 등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을 벌여 피해를 입혔다. 1909년 2월부터 의병장이 되어 경상남도 전역을 전전하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09년 10월 11일 창원군 내서면 여율리에서 밀고를 받고 출동한 마산주재소 일본 경찰 2명에게 붙잡혀 순국하였다. 취조 과정에서도 끝까지 부하들의 이름과 잠복지 등을 밝히지 않고, 향년 43세로 순국했다.
국권 상실을 끝까지 막기 위해 의병활동을 했던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양산시 상북면 수서로 159(좌삼리 97번지)에 그의 생가가 있었으나 현재는 멸실되고 생가터와 기념비가 남아 있다.
서병희 부대와 같은 후기 항일 의병은 일제의 주권 강탈을 늦췄으며, 향후 전개될 국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평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