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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오 묵죽도
시대 : 일제강점기
크기 : 33.3×136.5(cm)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1862 ~ 1935)는 조선 말기와 근대기의 서화가로, 흥선대원군에게 서화를 배웠고 청나라를 여행 중에 민영익, 포화와 교유하며 그들의 화풍에 영향을 받았다. 대구를 중심으로 국내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국채보상운동(1907), 대한협회(1908), 대구은행 감사 역임 등이다. 주로 사군자를 많이 그렸는데 특히 난과 대나무가 주를 이룬다.
1901년을 전후하여 중국 상해(上海)로 가서 그곳에서 활동하던 중국인 서화가 포화(蒲華)·오창석(吳昌碩) 등과 가까이 접촉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대나무나 연꽃 그림에서 포화에게 영향을 받은 구도와 필치가 보인다. 1920년대에 이르러 대나무를 거침없고 호방하게 그리는 등 자신만의 화풍을 형성하였으며, 그의 호를 따서 '석재죽'(石齋竹)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또한 옛 예서(隸書)인 고예(古隸)에 관심이 많았고, 그 외에 김정희(金正喜)의 추사체(秋史體)나 당시 상하이에서 유행하던 하소기체(何紹基體)의 영향도 받았다. 경봉스님이 머물던 통도사 극락암에 걸린 ‘三笑窟(삼소굴)’ 현판 역시 석재 서병오가 쓴 것이다.
묵죽도는 석재 서병오가 우산 윤현진 선생의 강인한 기개를 칭송하며 대나무 그림을 감상하라고 그려준 것으로 이를 통해 서병오와 윤현진의 교류가 상당했음을 잘 보여준다.
크기 : 33.3×136.5(cm)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1862 ~ 1935)는 조선 말기와 근대기의 서화가로, 흥선대원군에게 서화를 배웠고 청나라를 여행 중에 민영익, 포화와 교유하며 그들의 화풍에 영향을 받았다. 대구를 중심으로 국내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국채보상운동(1907), 대한협회(1908), 대구은행 감사 역임 등이다. 주로 사군자를 많이 그렸는데 특히 난과 대나무가 주를 이룬다.
1901년을 전후하여 중국 상해(上海)로 가서 그곳에서 활동하던 중국인 서화가 포화(蒲華)·오창석(吳昌碩) 등과 가까이 접촉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대나무나 연꽃 그림에서 포화에게 영향을 받은 구도와 필치가 보인다. 1920년대에 이르러 대나무를 거침없고 호방하게 그리는 등 자신만의 화풍을 형성하였으며, 그의 호를 따서 '석재죽'(石齋竹)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또한 옛 예서(隸書)인 고예(古隸)에 관심이 많았고, 그 외에 김정희(金正喜)의 추사체(秋史體)나 당시 상하이에서 유행하던 하소기체(何紹基體)의 영향도 받았다. 경봉스님이 머물던 통도사 극락암에 걸린 ‘三笑窟(삼소굴)’ 현판 역시 석재 서병오가 쓴 것이다.
묵죽도는 석재 서병오가 우산 윤현진 선생의 강인한 기개를 칭송하며 대나무 그림을 감상하라고 그려준 것으로 이를 통해 서병오와 윤현진의 교류가 상당했음을 잘 보여준다.

